중앙일보 [리뷰]
[제목]: 스타일
[저자]: 백영옥
[대출]: 정독도서관 (NOV 28 - DEC 12, 2009)
[독서]: 제1회독 (NOV 28 - DEC 05, 2009)
- 세계일보 주관,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 작가의 말 (p.334):
- 작중 편집장의 활약에 관한 묘사가 인상적 (pp.56-59):
소설의 주인공 이서정처럼 나 또한 얽혀 있는 두 가지 욕망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지 늘 고민한다.
나는 이것이 치열하게 일하는 이 시대 도시 여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날씬하면서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는가.
근사한 여행을 하면서 돈 많은 여행사가 아닌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세상의 편집장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잡지의 편집인? 몽땅 보자기에 싸서 건물 밑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불만투성이 기자들?
박스에 넣어서 에티오피아나 부탄 같은 곳으로 퀵 배송 시키고 싶은 콧대 높은 경쟁지의 편집장들?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다름 아닌 광고주들이다.
이태리 "보그"나 파리 "엘르"는 얇은데 왜 유독 우리나라 잡지만 두꺼울까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
문제는 광고들 때문이다.
한국 시장에선 광고가 붙지 않는 잡지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잡지는 판매부수가 아닌 광고로 먹고 산다.
"A" 매거진이 오늘날 백과사전 두께를 갖게 된 것도 광고 때문이다.
주님 위에 광고주님이라고, 광고팀 사람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그 광고주들이 언제나 문제였다.
하지만 "A" 매거진의 김혜숙 편집장은 달랐다.
그녀는 광고주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광고를 위해 좋은 지면을 빼주거나 광고료로 돈 대신 물건을 떠안는 일도 하지 않는다.
특히 어렵게 완성한 기사를 급하게 들어오겠다는 광고 때문에 다음 호로 미루는 일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회사 내에 적이 많았다. 새로 온 사장도 광고팀 이사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21세기 편집장은 에디터가 아니라 마케터가 되어야 합니다!"
이건 새로 부임한 사장이 늘 주장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잡지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
세상에 편집장들은 많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에겐 분명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선 이런 여자가 눈부시게 빛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녀에게는 많은 단접이 있다.
잠이 없는데다 애인마저 없어서 '불멸의 일중독자'란 별명을 얻었다.
지나칠 정도로 다혈질이다. 욕도 잘한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도 잘 집어던진다. 폭력적이다.
그런데 엉뚱할 정도로 섬세해서 사람을 늘 헷갈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섬세함은 대부분 '예쁜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예쁜 것 밝힘증은 업계에선 전설적일 정도이다.
편집장의 책상 위에는 온갖 예쁜 것들이 있다.
밀라노나 뉴욕, 파리의 패션주간에 갔다가 사온 그림들과 액세서리들,
브랜드 홍보녀들이 사온 각종 선물들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다.
특이한 건 그 중엔 기자들이 남긴 포스트잇도 붙어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잇에 별 내용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 국장님, 저 출장 가요. 담달 24일에 와요.
- 국장님, 송강호 섭외됐어요. 만세!
대충 이런 업무 보고들이다.
그런데도 편집장은 내게 늘 잔소리를 해댔다.
"이서정, 너 글씨 좀 예쁘게 쓰면 안돼?"
"원래 못 쓰는데요."
말대꾸라도 하는 날이면 편집장은 몇 시간씩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악필이면 분위기라도 있던가.
네 글씨는 왜 이렇게 뚱뚱하니?
네 글씨 보면
꼭 다이어트에 실패한 뚱뚱한 신입생이 화장실에서 억지로 토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우울해.
너 악필교정 학원 같은 데라도 다니면 안 되니?"
더 말해 뭐하랴.
글씨에서도 몸매와 표정을 보는 편집장에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긴급하게 알리는 전화번호조차 예쁘게 적길 바라는 그녀다.
그 후로 나는 포스트잇에 글씨를 쓰지 않는다.
대신 메일을 보낸다.
컴퓨터가 귀했던 20년 전에 이곳에 입사했다면
아마 나는 이 잡지사에서 잘렸을 것이다.
글씨가 너무 푹 퍼지고 뚱뚱하다는 것 때문이다.
전설적인 다른 사건도 있다.
지금은 그만둔 패션팀 차장이 찍은 화보가 문제였다.
'로맨티즘'이란 테마를 가지고 찍은 그 화보는 누가 봐도 아름답고 독창적이었다.
동화 속 백설 공주가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계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맞을! 10시 10분이 아니잖아! 니들 제정신이야?"
시침과 분침이 달려 있던 그 시계는 4시로 맞추어져 있었다.
"이 시침과 분침 좀 봐. 넓게 벌어져 있는 게 얼마나 흉해.
시계가 다리 쩍 벌리고 무슨 요가 하니? 창녀같이 헤퍼 보이잖아!"
문제의 화보는 시계 화보가 아니라 패션화보였다.
하지만 편집장은 단지 시계 바늘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결국 석 달을 넘게 준비한 그 화보를 잡지에 넣지 않았다.
편집팀에게 일장연설도 늘어놓았다.
무수한 광고 사진에서 시계를 10시 10분에 맞춰 놓고 찍는 건 그게 미학적으로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패션 디렉터라면 그런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런 걸 무시하는 무식한 디렉터와는 절대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게 편집장의 직언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일에 충격을 받은 패션 디렉터는 사표를 냈다고 한다.
물론 이 얘긴 '전설 따라 삼천리~' 정도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패션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분명한 건 이런 집착과 결벽증, 히스테리와 변덕에도 불구하고 편집장에게는 놀라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 혹독한 패션계에서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독특한 매력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