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산타 에비타 [저자]: Tomás Eloy Martínez [역자]: 권미선 [대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JAN 31 - APR 29, 2011) [독서]: 제1회독 (FEB 16- MAR 09, 2011)
아르헨티나의 國母, 에비타 死後, 방부처리된 屍身의 유랑기.
발췌: 『에바 페론(El caso Eva Perón)』(#1, p.36에서 재인용).
박제사, 페드로 아라 박사의 死後 비망록
그날 오후 그녀를 본 그 짧은 몇 초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를 볼 수만 있었더라도 꽃향기가 전해지는 듯한 그녀의 숨소리를 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십대의 젊고 화사한 기운을 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아무런 주저 없이 그녀의 시신을 원래 모습 그대로 돌려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내게로 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많이 상한 후였다. 이런 경우에는 순전히 내 직감과 그녀의 사진에만 의지해서 작업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피에타나 빅토리 데 사모트라시아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보다 많이 그녀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는 그런 바람이 그녀를 더욱 완벽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략) '잠들지 못하는 성녀' 에비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가 1952년 33살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시작된다. 페론은 에비타의 주검을 미라로 만들어 노동복지부 건물에 안치했다. 장례에는 몇백만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1955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에비타의 주검을 빼돌려 병영에 숨겼다. 에비타 숭배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싹을 자르려 한 것이다. 주검은 그 뒤 16년 동안 다섯 나라를 떠돌며 방랑의 세월을 보낸다. 1970년 페론 추종자로 구성된 좌파 게릴라단체 몬토네로스는 페드로 아람부루 장군을 납치해 주검을 숨긴 곳을 추궁하고 끝내 그를 살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에비타의 주검은 1974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남편 페론의 관 옆에 놓이게 된다. 이어 1976년 탈취를 막고자 보안장치를 한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이장된다. 주검이 옮겨질 때마다 수많은 지지자와 반대자가 몰렸다. 지도자의 죽음과 장례가 대중을 강력히 결속시킬 수 있음을 실증한 예다. (후략)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명실상부한 '퍼스트' 레이디였다. 각 나라에 한 명씩은 있게 마련인 대통령의 아내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력을 행사한 권력자였다는 말이다. 그녀는 후안 페론이 권력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권 후에도 아르헨티나의 사회 보장 분야와 노동 정책을 담당하였다. 에바 페론은 아직도 페로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그녀의 정치적 업적은 특히 평등주의를 현실화했다는 데서 빛난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 계층이자 남편 후안 페론의 지지 세력인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에바 재단을 세워 모금을 하고 그 기금으로 의료 사업과 장학 사업을 지원했으며, 하층민들이 전기나 수도 등의 혜택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을 위한 국가 보조금을 삭감하는 데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바 페론은 하층 국민들의 우상이자 구원의 상징 또는 성녀였던 것이다.
페미니즘적 성과도 에바의 치적으로 거론된다. 1949년 페로니즘적 여성 정당을 창설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정치적 지위를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 페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여러 비난 중 한 가지는 에바를 창녀로 몰아붙이는 것인데, 영화 「에비타」에서도 묘사되었듯이 그녀가 유럽을 순방할 때 스페인에서는 4만 명 이상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로마에서는 창녀라고 욕하며 계란 세례를 퍼붓는 군중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바를 천한 여자로 여기는 태도는 아르헨티나의 상류 계층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마르티네즈(『산타 에비타』, 자작나무)가 소개하는 예를 보면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암 치료를 위해 에바의 자궁을 들어내던 날 침묵하지는 못할망정 환호하던 무리들이 있었고, 길거리 담벼락에는 '암, 만세!'와 같이 병마를 응원하는 낙서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교양 있는 상류층의 입장에서는, 에바와 후안 페론이 펼친 하층 계급 중심의 정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천박한 사생아이며 바람둥이 3류 배우였던 에바를 국모로 모시는 일이 대단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에바가 출산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천박한 씨앗의 잉태를 영원히 막는 것이니 기뻐할 일이었다. 에바 자신도 과거의 이력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출생 증명서 등 과거 기록을 위조·폐기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엄하게 처벌했다.
이렇듯 에바의 과거를 문제삼아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입장들은 그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비판이 있다면 이것은 에바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이 비판은 실제로 후안 페론이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바는 독재 정권의 유지에 기여했던 인물이 되는 셈이다. 사실 후안 페론은 개발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을 번번이 훼손하였다.
후안 페론은 모든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이 언론 탄압에 능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사의 문을 닫는 일은 예사였고 언론사 자산까지 몰수했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서 페론 부부의 숭배를 중요 커리큘럼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 것도 후안 페론이었다.
후안 페론은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도 종종 심각한 지경까지 몰고 갔다. 1949년 헌법 개정을 통해 후안이 대통령 재임을 노리자,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그러자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페론 세력은 국가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자들을 투옥할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많은 정치인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후안 페론이 맞은 두 번째 대통령 선거도 비정상적으로 치러졌다. 원래의 선거일보다 앞당겨 1951년 12월에 선거를 실시했고, 이런 정치적 음모의 결과 후안 페론은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재선되었으며, 그의 정당은 149석 중에서 135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모든 독재 행각이 에바가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기에, 그녀도 당연히 독재 정치에 한몫 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평가야 어떻든 후안 페론의 집권기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에바는 1952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암세포는 그녀의 몸을 차근차근 잠식하였고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다. 35킬로그램에 불과한 몸으로 마지막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에바는 곧 사망했으며, 아르헨티나는 그녀의 죽음에 오열했다.
에바 사망 3년 후, 즉 1955년 후안 페론은 권좌에서 물러나 파라과이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한다. 이런 사태의 중요한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이 페론 정부와 카톨릭 사이의 알력이다. 1954년 겨울, 페론은 한 카톨릭 성직자 단체를 선동 혐의로 기소했고,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과 사생아 그리고 매춘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런 상황이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 간의 격렬한 불화를 초래해 후안 페론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페론 정부의 실각은 反민주적인 정치에 의해 민심이 이반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후안 페론의 하야에 즈음하여 발발한 쿠데타와 내전으로 약 4,000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결국은 후안 페론과 에바의 정치적 일탈 행위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젊고 아름다운 권력자 에바, 그러나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그녀의 사후에까지 이어진다. 아니 어쩌면 더더욱 슬픈 일들이 그녀가 죽은 후에 벌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영화에서 에바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져도 영원히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여러분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 나의 말은 모두 진심이랍니다."
에바의 유지처럼, 그녀가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지워 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남편 후안 페론도 그 부류에 속한다는 점은 개운치 않다.
페론 부부에 대단히 적대적인 논조의 책 『에비타』(P. L. 몽고메리 지음, 동천사)는 에바 사망 후 후안 페론이 노골적인 성적 방탕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안 페론이 국립 여자고등학교를 세우는 데 2,000 만 달러를 쏟아부은 것도 그 학교가 대통령 침소에 들 소녀들의 공급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도 후안 페론이 또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맨틱한 기대가 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암으로 잃고 두 번째 부인인 에바도 암으로 잃고 난 후 이사벨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도 에바처럼 하층 출신으로 과거 무용수였다. 알려지기로는 그들이 1955년이나 56년에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마드리드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사벨도 동행하여 1961년에 결혼한다. 이사벨은 1931년생이니 서른의 나이에 환갑이 훨씬 지난 남자와 커플을 이루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얻기는 했지만,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에바를 떠나 보낸 후안 페론은 고단한 정치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에바가 사망한 지 불과 수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또한 20년 가까이 기약없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973년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다음 해 사망하고 만다. 당시 부통령이던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 노동 운동 그리고 정치적 쟁투 때문에 이사벨의 집권 기간은 내내 불안정했다. 결국 이사벨은 1975년 12월 쿠데타로 축출되었으며, 1981년에는 부패혐의가 확정되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에바의 남편도 남편의 새로운 아내도 모두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만 것이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에바의 죽음은 그녀의 친족들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에바가 퍼스트 레이디가 된 덕분에 가족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해 야자수가 늘어선 부촌에 저택을 짓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 도냐 후아나는 장관들과 도박을 하면 무조건 승리하는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도 에바의 권력에 힘입어 꿈에도 소망하지 못했던 행복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에바의 사망 직후 후안 페론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에바의 가족을 철저히 외면했다. 어머니 도냐는 충격으로 병을 얻었고, 그들은 도청 장치 때문에 자기들 방에서도 대화를 글로 대신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비극적 가족사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에바의 남동생 후안시토였다. 그는 애인이 자신의 횡령을 폭로하자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에바 사망 후 몇 개월 만에 그 부유한 가족은 완전히 파멸하고 만 것이다.
가장 끔찍한 비극은 에바의 시신이 감당해야 했다. 후안 페론은 에바가 죽자 150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울 계획도 했으나, 그보다는 에바의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에바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에바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그의 결정은 전대미문의 시신쟁탈전을 야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방부 처리된 에바의 시신은 아르헨티나의 곡절 깊은 현대사 속에서 한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1955년 페론이 쫓겨난 뒤, 정적들은 그녀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옮겨가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그 사이 에바의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1971년 그 유해는 아르헨티나 내의 페로니스트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마드리드의 후안에게로 옮겨진다. 후안 페론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이사벨이 대중적 지지를 노려 대통령궁에 에바를 묻었을 때, 이제 망자에게 평안이 찾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2년 뒤 反페로니즘 군대 일파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에바의 시신과 이사벨을 몰아 낸다. 이렇게 에바의 시신은 20년 이상을 떠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
에비타 살았을 적 이야기 보따리를 기대했는데, 읽고 보니, 죽은 뒤 시체를 둘러싼 숨바꼭질 이야기.
1908년 아테네에서 대학을 마치고 파리로 간 카잔차키스는 이곳에서 生哲學者 앙리 베르그송을 만난다.
그가 베르그송에게 경도된 것은, 인간 존재란,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딛고 넘어가게 마련된 단계에 불과한 것, 따라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약의 디딤돌로 인간이 창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기의 예감을 베르그송의 생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론」, p.489.)
니체.
카잔차키스를 구축하는 정신의 피라미드 바닥에는 또 한 사람의 유럽 철학자가 있다. 베르그송 다음으로, 그가 저서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철학자는 니체다. 니체의 <초인>을 인류의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구원의 문은 우리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에게 <초인>은 희망이다. <초인>은 대지의 종자이며, 해방은 그 종자 속에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심연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마땅히 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진 지금, 우리 의지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론」, p.490.)
조르바.
조르바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세계적인 작가로 일으켜 세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서전 『그리스 인에게 고함』에서 실존 인물 조르바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힌두교도들은 <구루(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둘이서 벌인 사업이 거덜 난 날 우리는 해변에 마주 앉았다. 조르바는 숨이 막혔던지 벌떡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는 중력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느님, 작고하신 우리 사업을 보우하소서. 오, 마침내 거덜났도다!>
바로 이 대목이 저 유명한 영화 『조르바』에서 조르바로 나온 안소니 퀸이 해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안소니 퀸은 1995년에도 뉴욕에서 장기 공연된 무대극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역을 맡은 바 있다.
호쾌하고 농탕한 사나이 조르바는, 떠도는 인간 카잔차키스가 한동안 쉬어 가고 싶어 하던 구원의 오아시스였다.
(「작가론」, p.494.)
「작가론」을 쓴 옮긴이가 덧붙이는,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골을 남긴 사람:
부처.
카잔차키스가 자기 영혼에 골을 남긴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다음으로 꼽은 사람은 조르바이다. 그러나 그가 영혼의 편력에서 니체 다음으로 만난 이는 부처였다. 조르바와의 진정한 만남은, 부처와의 만남을 통한 <위대한 否定>의 경험 이후에나 가능했다. 지극히 이성적이던 그의 문학은, 불교적 세계관과 만나면서부터 불교적인 禪風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는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말하자면 대극하는 무수한 개념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초라한 언어를 통한 온갖 是非를 삶 속으로 녹여 들인다.
그래서, 그가 편도나무에게 신이 무엇이냐고 묻자 편도나무는 대답 대신 꽃을 피워 버리는 것이다.
(「작가론」, pp.491-492.)
카잔차키스의, 조국 그리스 여행:
아토스 산 순례기:
아토스 산은 기암 절벽의 험산이다. 아토스 산은 수도원과 수도승의 산이다.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라고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제비 집처럼 붙어 있는 수도승들의 암자뿐이다.
(「작가론」, p.484.)
그가 아토스 산에서 만난 (거짓) 수도승들:
동굴의 마카리오스: 극단적인 영혼 지상주의자.
한 파계승: 극단적인 육체 지상주의자.
"......내 나이 벌써 예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수도승이 되었어요. 그로부터 근 20년 동안 나는 저 아토스 산 수도원에서 하느님 말씀만 묵상했어요. 태어난 뒤로 한번도 여자를 가가이해 본 적이 없으니, 여자에 대한 열망으로 괴로워할 일이 있었을 리 없지요. 날이면 날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땅바닥을 짚고 기도를 올렸지만 하느님은 내 앞에 나타나 주시지 않았어요. 나는 절망한 나머지 하느님께 간구했지요. 하느님, 나같이 하찮은 인간이 무슨 수로 하느님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만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이승 것이든 천국 것이든 구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시어, 제가 기독교인이 된 보람을 느끼게 해주시고, 아토스 산에서 보낸 세월이 헛된 세월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울고불고,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하릴없었어요. 내 마음은 열리지 않았어요. 악마가 내 마음을 잠그고 열쇠를 감추어 버렸었나 봐요. 그렇게 헛된 세월을 보내다가 살로니카로 파견된 뒤에야......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 줄을 알면서도 나는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답니다. 아...... 그 여자와 동침한 날 밤, 나는 평생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가 부활하고 있다는 기가 막히는 느낌을 경험했답니다. 육신이 쾌락의 절정을 누리는 순간, 하느님이 두 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그날 밤 난생 처음으로 날이 밝아 오기까지 감사 기도를 드렸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나는 기쁨을 모르는 인간, 기뻐해서는 안 되는 줄만 알고 있었던 인간이었어요. 그러나 여자를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다른 인간이 되었지요. 나는 그제서야 하느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 분이신지 깨닫고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었어요.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통하여 나를 잠시나마 천국으로 이끌어 주셨던 것이지요. 나는 단식이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하느님 뵙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40년 전의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죄 역시 하느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속죄하라고요? 나는 안 해요.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느님의 벼락을 맞아 콩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나는 속죄하지 않겠어요. 내게는 뉘우칠 게 없어요......."
(「작가론」, pp.485-489.)
'파계승의 고해를 듣는 순간' = '청년 카잔차키스가 새로운 십계명을 찾아 긴 여정에 오르는 순간'.
조르바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 (pp.345-351).
"당신 대답이나 좀 들읍시다, 조르바, 어물쩍 내 질문을 피하지 마시고! 내 보기에는 당신은 조국 같은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어때요? 그런가요?"
(중략)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 인이든, 불가리아 인이든 터키 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 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 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런데, 여자라면...... 젠장,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집니다요. 두목, 당신은 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지요.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젖통만 쥐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들어 버리는 이 가엾은 것들을 말입니다."
(중략)
조르바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두어 모금 빨고는 던져 버렸다.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어져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것이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 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 두 눈을 감았다.
"두목, 주무시오?"
조르바가 잔뜩 부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붙잡고 이야기하는 내가 병신이지!"
옮긴이 이윤기의 요약:
카잔차키스의 문학은 존재와의 거대한 싸움터, 한두 마디로는 싸잡아서 정의할 수 없는 광활한 대륙을 떠올리게 한다.
불평하는 걸 재미있어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만, 릴리는 자신이 하는 공부를 정말 사랑했다.
8학년 때 선생님에게 그녀의 동그란 얼굴과 검은 곱슬머리를 보면 그가 늘 꿈꿔왔던 롤리타가 생각난다 는 말을 들은 후부터 릴리는 러시아 문학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곧장 집에 가서, 교사와 롤리타의 관계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性 도착증에 대한 나보코프의 대작을 탐독했고,
그 다음에는 나보코프의 모든 작품을 해치웠다.
톨스토이, 고골리, 그 다음에는 체호프도.
대학에 지원할 때가 되자, 릴리는 브라운 대학의 어느 러시아 문학 교수를 지목해 그 밑에서 공부하겠다고 했다.
열일곱 살짜리 릴리를 면접한 교수는 그녀가 학부, 대학원생 가릴 것 없이 자기가 본 학생 중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장 많이 읽은 가장 열정적인 학생이라고 단언했다.
그녀는 지금도 러시아 문학을 사랑했고, 러시아어 문법을 공부했고, 원본으로 뭐든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넋두리하는 걸 무척 즐겼다.
유능한 편집장의 일솜씨 (Vol.2, p.60):
내가 보기에도 미란다는 정말 뛰어난 에디터였다.
그녀의 승인 없이는 잡지에 단 한마디도 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승인을 얻기도 힘들었다. 또 미란다는 이제껏 해놓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설사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고 힘들게 할지라도.
수많은 패션 에디터가 촬영을 위해 옷을 협찬받지만,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이 나오도록 옷을 고르고 그에 딱 맞는 모델을 찾아내는 에디터는 미란다뿐이었다.
실제 촬영이야 촬영담당 에디터가 하지만, 사실 그들은 미란다가 내리는 구체적이고 놀랍도록 세세한 지시사항을 그대로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매호 팔찌, 백, 구두, 의상, 헤어스타일, 기사, 인터뷰, 작가, 사진, 모델, 장소 하나하나까지 그녀가 최종 결정을(때로는 사전 의견도) 내렸다.
매달 잡지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라는 생각은 나도 했다. 미란다 프리스틀리가 없다면 런웨이는 런웨이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 사실을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편지 더미에서 본 마지막 편지는 한 십대 소녀가 보낸 듯한 것이었다. 글씨체는 동글동글했다. 'i'의 점은 하트로 표시되어 있었고, 유쾌한 문장 옆에는 스마일 표시 같은 이모티콘이 그려져 있었다. 대강 훑어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편지 내용이 너무 슬프고 정직해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편지지가 온통 피를 흘리며 애원하고 간청하는 것 같았다. 사 초가 지났는데도 나는 계속 읽고 있었다.
미란다님께
제 이름은 애니타예요. 열일곱 살이고 뉴저지 주의 뉴아크에 있는 배링어 고등학교 졸업반이죠. 남들은 제가 뚱뚱하지 않다지만, 전 몸매에 정말 자신이 없어요. 저는 당신 잡지에 나오는 모델처럼 되고 싶어요. 엄마는 제가 용돈을 패션잡지 사는 데 다 써버린다고 야단치시지만, 전 매달 런웨이가 오기만 기다린답니다. 엄마는 제 꿈을 이해하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이해해주시겠죠? 제겐 어릴 때부터 꿈이 있어요. 이루어질 것 같진 않지만. 왜냐고 물으시겠죠? 제 가슴은 너무 납작하고 엉덩이는 당신 잡지에 나오는 모델들의 엉덩이보다 훨씬 크거든요. 정말 창피해 죽겠어요. 이러고도 계속 살아야 될까 싶을 정도예요. 전 변하고 싶어요. 더 예뻐지고, 더 나아졌다고 느끼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어요. 전 정말로 바뀌고 싶어요. 거울을 봤을 때 제 가슴과 엉덩이가 세계 최고의 잡지에 나오는 모델들의 것과 똑같아 보였으면 좋겠어요.
미란다, 전 당신이 아주 멋진 패션 에디터이고 절 새롭게 변화시켜줄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주시면 전 영원히 감사드릴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수 없다면, 제가 특별한 행사 때 입을 수 있게 아주아주아주 멋진 드레스 한 벌만 주시면 안 될까요? 전 아직 데이트를 해본 적은 없지만, 엄마는 여자애들끼리만 외출하는 건 괜찮대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요. 저에게는 낡은 드레스 한 벌밖에 없어요. 디자이너의 드레스도 아니고, 런웨이에서 보여주는 드레스들과는 거리가 멀어요. 제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1위 프라다, 2위 베르사체, 3위 장 폴 고티에예요.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더 많지만, 이 셋을 제일 좋아해요. 제겐 이 디자이너들의 옷이 한 벌도 없어요. 상점에서 본 적도 없고요(뉴아크에도 이런 디자이너 옷들을 파는 데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아시면 알려주세요. 어떻게 생겼는지 가까이서 꼭 보고 싶어요). 전 그런 건 다 런웨이를 통해서 보고 있어요. 그리고 정말정말 그 옷들을 사랑해요.
이제 그만 방해할게요. 당신이 이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해도 저는 당신 잡지를 사랑할 거예요. 왜냐하면 전 모델과 의상을 모두 너무나 사랑하거든요. 물론 당신도 매우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하는 애니타 알바레즈
P.S. 제 전화번호는 973-555-3948이예요. 혹시 전화하실 거면 7월 4일 전에 해주세요. 그때 예쁜 드레스가 정말 필요하거든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편지지에서는 장 나테의 톡 쏘는 오 드 투알레트 향기가 났다. 어린 소녀들이 좋아하는 향이었다. 내 목이 콱 멘 건 그 냄새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애니타 같은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을까? 인생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어린 소녀들이 런웨이에 나오는 옷과 모델에 맞춰 자신의 가치와 자신감과 전 존재를 측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매달 그 따위 것들을 사모아가며 그런 잡지들을 만드는 여자(그런 유혹적인 판타지의 지휘자)를 무조건 사랑하기로 결심한 걸까? 실제로 그 여자는 그런 사랑을 단 일 초도 받을 가치가 없는데 말이다. 그들이 숭배해 마지 않는 그녀가 사실 외롭고 불행하며, 그런 순수한 애정과 관심을 잠깐이라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잔인한 여자라는 사실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애니타 같은 여자애들이 샬롬 할로우나 스텔라 테넌트, 카르멘 카스 같은 모델이 되고 싶어 애쓰는 걸 생각하면 나는 울고만 싶어졌다.
미란다는 그애들의 편지를 받아봤자 눈 한번 깜박하거나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말 것이다. 누가 썼는지 관심도 없이 편지를 던져버릴 여자를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다니! 나는 편지를 책상 윗서랍에 넣고, 애니타를 도울 길을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여자애는 비슷한 편지를 보낸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절박해 보였다. 곧 데이트를 한번 해보고 싶은 여자애를 위해 넘쳐나는 물건들 중 우아한 드레스 한 벌쯤 보내준들 어떻게 되랴 싶었다.
통쾌무비한 辭職의 의사표시 (Vol.2, pp.303-304):
"나쁜 년, 엿이나 처먹어."
그녀는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숨을 헐떡거렸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꽤 많은 딱딱이들이 무슨 소동인지 보려고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음을 감지했다. 그들은 우리를 가리키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어시스턴트가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한 명에게 그렇게(그것도 전혀 나직하지 않게) 말했다는 사실에 미란다만큼 경악하고 있었다.
"앤-드리-아!"
그녀가 갈퀴 같은 손으로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그걸 뿌리치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말로 속삭이던 걸 멈추고 우리의 작은 비밀을 모든 사람이 듣게 해야 할 때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편집장님."
나는 파리에 온 이래 처음으로 떨지 않고 침착하게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내일 파티에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네요. 이해하시죠? 분명 파티는 무척 멋질 겁니다. 그러니 마음껏 즐기시길 빌겠습니다. 이상."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난 가방을 어깨 위로 휙 올리고 발바닥에서 발가락까지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무시하며 또각또각 걸어나가 택시를 불렀다. 그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제 나는 집으로 갈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서정처럼 나 또한 얽혀 있는 두 가지 욕망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지 늘 고민한다. 나는 이것이 치열하게 일하는 이 시대 도시 여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날씬하면서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는가. 근사한 여행을 하면서 돈 많은 여행사가 아닌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
작중 편집장의 활약에 관한 묘사가 인상적 (pp.56-59):
세상의 편집장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잡지의 편집인? 몽땅 보자기에 싸서 건물 밑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불만투성이 기자들? 박스에 넣어서 에티오피아나 부탄 같은 곳으로 퀵 배송 시키고 싶은 콧대 높은 경쟁지의 편집장들?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다름 아닌 광고주들이다. 이태리 "보그"나 파리 "엘르"는 얇은데 왜 유독 우리나라 잡지만 두꺼울까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 문제는 광고들 때문이다. 한국 시장에선 광고가 붙지 않는 잡지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잡지는 판매부수가 아닌 광고로 먹고 산다. "A" 매거진이 오늘날 백과사전 두께를 갖게 된 것도 광고 때문이다. 주님 위에 광고주님이라고, 광고팀 사람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그 광고주들이 언제나 문제였다.
하지만 "A" 매거진의 김혜숙 편집장은 달랐다. 그녀는 광고주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광고를 위해 좋은 지면을 빼주거나 광고료로 돈 대신 물건을 떠안는 일도 하지 않는다. 특히 어렵게 완성한 기사를 급하게 들어오겠다는 광고 때문에 다음 호로 미루는 일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회사 내에 적이 많았다. 새로 온 사장도 광고팀 이사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21세기 편집장은 에디터가 아니라 마케터가 되어야 합니다!"
이건 새로 부임한 사장이 늘 주장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잡지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
세상에 편집장들은 많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에겐 분명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선 이런 여자가 눈부시게 빛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녀에게는 많은 단접이 있다. 잠이 없는데다 애인마저 없어서 '불멸의 일중독자'란 별명을 얻었다. 지나칠 정도로 다혈질이다. 욕도 잘한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도 잘 집어던진다. 폭력적이다. 그런데 엉뚱할 정도로 섬세해서 사람을 늘 헷갈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섬세함은 대부분 '예쁜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예쁜 것 밝힘증은 업계에선 전설적일 정도이다.
편집장의 책상 위에는 온갖 예쁜 것들이 있다.
밀라노나 뉴욕, 파리의 패션주간에 갔다가 사온 그림들과 액세서리들, 브랜드 홍보녀들이 사온 각종 선물들이 그야말로 산더미 같다. 특이한 건 그 중엔 기자들이 남긴 포스트잇도 붙어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잇에 별 내용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 국장님, 저 출장 가요. 담달 24일에 와요. - 국장님, 송강호 섭외됐어요. 만세!
대충 이런 업무 보고들이다.
그런데도 편집장은 내게 늘 잔소리를 해댔다.
"이서정, 너 글씨 좀 예쁘게 쓰면 안돼?" "원래 못 쓰는데요."
말대꾸라도 하는 날이면 편집장은 몇 시간씩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악필이면 분위기라도 있던가. 네 글씨는 왜 이렇게 뚱뚱하니? 네 글씨 보면 꼭 다이어트에 실패한 뚱뚱한 신입생이 화장실에서 억지로 토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우울해. 너 악필교정 학원 같은 데라도 다니면 안 되니?"
더 말해 뭐하랴. 글씨에서도 몸매와 표정을 보는 편집장에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긴급하게 알리는 전화번호조차 예쁘게 적길 바라는 그녀다. 그 후로 나는 포스트잇에 글씨를 쓰지 않는다. 대신 메일을 보낸다. 컴퓨터가 귀했던 20년 전에 이곳에 입사했다면 아마 나는 이 잡지사에서 잘렸을 것이다. 글씨가 너무 푹 퍼지고 뚱뚱하다는 것 때문이다.
전설적인 다른 사건도 있다. 지금은 그만둔 패션팀 차장이 찍은 화보가 문제였다. '로맨티즘'이란 테마를 가지고 찍은 그 화보는 누가 봐도 아름답고 독창적이었다. 동화 속 백설 공주가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계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맞을! 10시 10분이 아니잖아! 니들 제정신이야?"
시침과 분침이 달려 있던 그 시계는 4시로 맞추어져 있었다.
"이 시침과 분침 좀 봐. 넓게 벌어져 있는 게 얼마나 흉해. 시계가 다리 쩍 벌리고 무슨 요가 하니? 창녀같이 헤퍼 보이잖아!"
문제의 화보는 시계 화보가 아니라 패션화보였다. 하지만 편집장은 단지 시계 바늘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결국 석 달을 넘게 준비한 그 화보를 잡지에 넣지 않았다. 편집팀에게 일장연설도 늘어놓았다.
무수한 광고 사진에서 시계를 10시 10분에 맞춰 놓고 찍는 건 그게 미학적으로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패션 디렉터라면 그런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런 걸 무시하는 무식한 디렉터와는 절대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게 편집장의 직언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일에 충격을 받은 패션 디렉터는 사표를 냈다고 한다. 물론 이 얘긴 '전설 따라 삼천리~' 정도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패션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분명한 건 이런 집착과 결벽증, 히스테리와 변덕에도 불구하고 편집장에게는 놀라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 혹독한 패션계에서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독특한 매력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