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7일 일요일

[Movie] La Batalla de Chile

[24_FEB_2013] La Batalla de Chile






정성일 글모음 [리뷰]


[제목]: 칠레 전투
[감독]: Patricio Guzman
[감상]: 서울아트시네마 (FEB 24, 2013)



  1. (작성중).



  2. 배경 해설: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100』, pp.392-397.

  3. 비바 칠레! -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

    1970년에 아옌데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보수세력과 좌파세력이 칠레를 번갈아 통치했다. 1950년대 정권을 잡은 보수정권들은 외국자본의 도입을 통해 경제발전을 모색하는 대외의존적인 경제정책을 폈다. 1958년에는 칠레에 대한 전체 외국투자 중 미국의 투자가 점하는 비율이 80%가 넘었다. 이는 칠레경제에 대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 과정에서 외채가 급증하면서 이의 상환을 위해 신규차관을 또다시 도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 후 이를 개혁하려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1960년대 중반에는 칠레의 100개 기업 중 61개가 외국인 투자 참여 업체일 정도로 칠레경제의 대외적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보수정부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등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좌파정당들과 급진당의 온건중도당이 선거를 위해 결성한 선거연합체인 '인민연합'의 아옌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칠레는 빈번한 군사 쿠데타에 시달린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오랜 기간 동안 정치세력들 간의 타협과 협력의 정치문화가 존재해왔고, 국민의 민주주의 역량이 강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여러 정파의 '인민연합'이라는 선거연합 결성이 가능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아옌데 정권이 등장했다. 아옌데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사회복지와 민주주의 정책을 규정하는 '민중연합정권이 추진할 40개 정책'을 역설하며 사회 하층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인민연합을 통한 좌파정치세력들의 단결로 아옌데 지지층이 크게 확대되었던 반면, 중도파와 우파정치세력의 분열로 국민당과 기독민주당은 선거를 앞두고 선거연합 구축에 실패했다. 그 결과 인민연합은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을 할 수 있었다.

    아옌데의 실험

    1970년, 아옌데 정권은 인민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광업이나 국가기간산업, 금융업 등을 국유화했다. 특히 구리산업의 국유화 조치는 실질적으로 보상이 아닌 몰수라는 혁명적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1,300여 명의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이를 분배했고, 그 결과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통한 소득 재분배 정책도 적극 시행되었다. 또한 의료시설과 교육시설의 확충, 주택개선 등이 추진되었다.

    아옌데 정권의 개혁정책으로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7%였고,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8%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이렇게 칠레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인민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아옌데의 좌절

    그러나 아옌데의 급격한 개혁정책은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우선 미국이 소유했던 구리 광산의 국유화는 미국의 경제봉쇄를 초래했으며, 국제 구리가격이 하락하면서 초기에 호조를 보이던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여기에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정책 추진으로 위기감을 느기고 있던 보수 야당들은, 반혁명적인 법률제정과 내각탄핵 등으로 아옌데 정부의 개혁을 좌절시키려 했다.

    자본가 계급 역시 생산을 위한 자본을 투기 자본화하고 상품을 제한적으로 출하함으로써 경제적 혼란을 부추겼다. 한 예로 트럭운수업자들과 상점주 등을 중심으로 한 파업이 일어났다. 칠레는 산악지대가 많아서 철도가 발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트럭운수업자들의 파업은, 식량과 자원의 유통이 불가능해져서 산업시설이 마비되고 생활필수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여기에 중소규모 제조업자, 은행원, 의사, 엔지니어 등의 연대 파업과 버스업자들의 동조파업이 더해져 국내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구리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아옌데 정권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입혔다. 이는 칠레경제의 핵심분야인 구리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아옌데 정권과 노동자들 간의 갈등을 나타냄과 동시에, 노동세력의 일부가 보수 야당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반혁명 공세에 대해, 아옌데 정권은 공급과 가격위원회를 통해 부족한 물품을 공정가격으로 확보했다. 또한 생산감시위원회를 통해 자본가들의 투기와 생산거부 호라동에 대한 감시 및 통제기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사회당 간의 분열과 의회 내 보수 야당들의 제동 등으로 인해 아옌데의 노력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군부의 이탈로 아옌데는 쿠데타를 방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세력을 상실했다. 이러한 인민연합 내부의 균열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정치, 경제적 압박 등과 결부되면서, 의회를 통한 아옌데의 사회주의 혁명은 좌절되었다.

    비바 칠레!

    1973년 3월 총선에서 보수 야당들과 자본가들은 대통령 탄핵이 가능한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들은 이에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퇴역장교들이 아옌데 대통령에 서한을 보내, 계속 헌법을 위반한다면 군부가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고 협박했다. 마침내 1973년 6월 29일 대표적인 우파조직인 '조국과 자유'가 주도한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났다. 우발적이었던 이 쿠데타는 전체 군부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하고 3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아옌데 정권은 점차 구체화되는 군부의 쿠데타 위협으로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이에 아옌데 정권은, 최후의 정치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의 실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정을 피노체트 장군을 비롯한 주요 육군 지휘관들에게 알렸다. 이는 국민의 지지여부에 따라 아옌데 정권이 칠레 국민을 대표하고 있지 못하다는 우파의 주장이 무력화될 수 있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3월 총선으로 남은 임기 3년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아옌데 대통령이 조기 하야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는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피노체트를 비롯한 쿠데타 주모세력들은 결과가 불확실한 국민투표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애초 9월 14일로 계획했던 쿠데타 일정을 국민투표 실시 발표 직전인 9월 11일로 조정했다. 9월 11일 새벽, 해군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군이 발파라이소를 점령했다. 3군 참모총장과 경찰국장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고 선언하면서, 아옌데 대통령은 24시간 이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1일 아침 8시 직후, 쿠데타군의 항공기가 대통령 집무실이 있던 모네다Moneda 궁 상공을 선회하면서 아옌데 대통령에게 외국으로 망명할 것을 요구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한 대 국민 담화에서, 칠레노동자들이 사임을 요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칠레 만세!(¡Viva Chile!), 민중 만세!(¡Viva el Pueblo!), 노동자 만세!(¡Viva los Trabajadores!)'를 외쳤다.

      지금 이 순간 폭격기가 머리 위를 날고 있습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칠레 민중이 보여준 충성심에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나는 칠레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사망하기 직전,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 중에서

    곧이어 대통령궁을 향한 쿠데타군의 폭격이 가해졌고, 아옌데 대통령은 경호부대를 대통령궁 밖으로 보내고 40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지하 벙커에서 최후를 맞았다.


      칠레의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 궁 앞의 '헌법광장'에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동상. 동상 아래에는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1973년 9월 11일"이라고 쓰여 있다.


    썩은 사과 골라내기

    1973년 9월 11일에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미국 국무성은 논평을 통해 "거듭 강조하거니와 미국정부와 미국정부 내 어떤 기관도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비밀해제된 미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국방부 등의 관련 극비문서에 의하면, 미국의 아옌데 정부 전복공작은 지난 1970년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닉슨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음을 밝히고 있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키신저의 지시를 CIA 칠레지부에 전한 비밀전문은, '아옌데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확고한 정책'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밀문서들에는 1973년을 전후해서 6년간 집중적으로 행해진 미 정보기관의 비밀공작의 실상이 낱낱이 적혀 있다. '뒷일을 걱정 말고 48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쿠데타 계획을 세워라' '쿠데타 전문가를 총동원하라' '칠레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공작금은 1,000만 달러로 하되 필요한 경우 더 사용해도 좋다' 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처럼 미국은 자신의 국가 이익에 반하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편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다양한 공작을 폈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은 이웃의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칠레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 대한 공작은 사과상자 속의 썩은 사과 하나 때문에 옆에 있는 다른 모든 사과도 썩게 된다는 '도미노 이론'처럼, 칠레로 인해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한 미국의 '썩은사과 골라내기'였다.


  4. 작품 해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 pp.189-192.

  5. '제3영화'로서의 다큐멘터리: <칠레 전투>

    <칠레 전투(La Batalla de Chile; The Battle of Chile)>(3부작: 각 1시간 30분)(1973-1979)는 아옌데 정부 통치기간 중 칠레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실험, 곧 제3세계에서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과 그 좌절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할 뿐 아니라, 마르크시스트의 시각에서 기록된 사건들을 분석하기도 한다. <칠레 전투>는 솔라나스와 게티노가 예견한 '제3영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부르주아 비평가들도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은 탄탄한 구성과 '새로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작품과 그것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추어 '기념비적'이라는 수식어에 충분히 값하는 영화이다.

    이러한 대작(?)의 촬영은 불과 다섯 명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진보적 영화활동가집단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들이 사용한 기재는 한 대의 16mm 에클레어(Eclair) 카메라, 한 대의 나그라(Nagra) 테이프 레코더, 그리고 외국의 후원자들이 보내 준 필름이 전부였다.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요구하는 민중세력과 외세를 등에 업고 진보세력을 분쇄하려는 반동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이 점점 첨예해지던 1973년 칠레의 정치적 상황을 '역사가 만들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록하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아옌데 정부가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무너지자 이들은 촬영을 중단하였고, 필름과 녹음 테이프들은 6개월에 걸쳐 외국으로 밀반출되었다. 칠레에 남았던 영화인들도 망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국 이들은 쿠바의 영화예술산업원(ICAIC)에 머물며 6년에 걸쳐 3부작으로 이 영화를 편집하였다. 다음은 <칠레 전투> 제작 집단의 한 명인 감독 파트리시오 구즈만(Patricio Guzman)이 미국의 평론가 쥴리안 버튼(Julianne Burton)과 한 인터뷰의 발췌이다 (//Socialist Review//, #35, Sept-Oct. 1977, pp.36-68).


    <칠레 전투>는 아옌데 정부의 마지막 해에 일어났던 정치적 사건들의 성격과 결과를 가능한 자세히 전달하려는 시도이다. 그때 칠레에서 일어났던 일은 칠레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칠레 외부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뿐 아니라 국제적인 노동자운동에서도 그러하다.

    칠레에서 일어났던 것은 일종의 20세기판 파리코뮌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한 주요한 생각들이 거의 전부 현실 속에 나타남을 보는 것은 놀랍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민중연합 집권 3년차였던 1973년에, 칠레의 민중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나 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내란』에 나오는 핵심적인 문제들에 매우 실제적인 수준에서 직면해야만 했다.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 매우 흥미로웠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카메라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담아야 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광각렌즈를 사용해야만 했고, 사건을 기록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카메라 위치를 잡아야 했다. 우리는 모든 과정이, 과정 전체가 영화 속에 담기기를 원했다.

    이것은 또한 편협한 당파적 관점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뜻하였다. 우리는 단일한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함은 실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왜냐하면 좌파 내부의 모든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흥미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칠레에서 진행중이던 사상투쟁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일어날 수 있었으며, 상황이 더욱 결정적 국면으로 발전하면 멕시코나 베네주엘라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칠레에서 시도되었던 정치적 모델의 원대한 의의야말로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칠레 전투>의 완전한 제목은 <칠레 전투: 비무장 민중의 투쟁(La Batalla de Chile: La Lucha de un Pueblo sin Armas / The Battle of Chile: The Struggle of a People without Arms)>이다. 제1부 「부르주아지의 봉기(La Insurreccion de la Burguesia / The Insurrection of the Bourgeoisie)」는 칠레에서의 핵심문제를 조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외세의 이익을 대변하는 매판세력과 합세한 중간층과 상류계층의 대중봉기와 함께, 도를 더해가는 우익의 봉기를 억누르기 위해 정부와 좌파가 전체로서 취했던 행동들이다. 제1부에서 기본모순은 파시즘/제국주의/부르주아지와 노동대중 사이에 존재한다. 제1부에서 대중들은 단지 언급의 대상으로만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이 부분은 우익이 어떻게 대중매체를 이용하고 제국주의 세력의 재정지원을 받아 부르주아와 군부의 모든 부문들로부터 광범위한 저항을 선동해냈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한 부문도 넘어갔는데, 엘테니엔테 광산의 동광 광부들이 바로 그들이다.

    제2부 「쿠데타(El Golpe de Estado / The Coup d'État)」는 동일한 모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2부는 민주적 민중세력에 맞서는 부르주아지의 대중선동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3의 차원이 덧붙여지는데, 그것은 좌익 내부의 여러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전략들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제2부는 제1부보다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동일한 변증법적 나래이션 스타일(나래이터가 최소한의 필수적인 배경정보만을 전달하고, 대부분의 분석은 영화가 기록한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직접 말하여지는 방식)을 유지하므로, 관객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한 3중모순을 이해해야만 한다.

    제3부 「민중의 힘(El Poder Popular / Popular Power)」은 3부작 중 가장 단순하다. 이 부분은 민중연합정부 집권시, 특히 1973년에 존재했던 대중조직들에 대한 애정어린 회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매우 실제적인 조직들이었으며, 식품과 일상용품의 공급, 곡물증산, 협동상점의 조직, 공장생산위원회의 구성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칠레에서의 투쟁 도중 민중세력은 때때로 잠시 행동으로부터 한발짝 물러나 초기건설단계에 있던 사회주의국가의 성격에 관하여 논의하곤 하였다.이것은 매우 침착하고 신중한 과정이었으며, 때로는 무척 감동적이기도 하였다. 항상 자신들의 현실경험에 기초를 둔,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론적 발전은 지극히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필름은 칠레 빈중의 엄청난 성장도를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제3부는 매우 부분적인 시각일 수밖에 없고 상부구조를 다루고 있지 아니하다. 정당들은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특정정당의 지도에 따르는 노동자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안에서, 민중연합정부의 모든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바로 머리 위에 적을 두고도, 칠레 노동자들은 미래에 고나하여-극도로 침착하게-토론하였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제작팀은 다섯 명으로 이루어졌다. 페데리코 엘톤은 재정과 기획을, 호르헤 물러는 카메라맨 겸 촬영감독, 베르나르도 멘즈는 사운드 기사, 호세 피노는 조감독 겸 조명, 그리고 내가 감독을 맡음으로써 집단작업 내에서 역할분담을 하였다.

    우리들은 1972년 12월에 모였으며 바로 그 시점에서 칠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어떠한 극영화 시나리오도, 줄거리를 가진 어떤 영화도, 도저히 현실 속의 사건들 자체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1973년 2월에 촬영을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우리는 선동영화(agitational film)가 아니라 분석영화(analytical film)를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우리는 칠레관객을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세 개의 가능한 길이 있었다. 첫째는 실제로 후에 일어났던 파시스트 쿠데타의 길이요, 둘째와 셋째는 내란의 발발에 따른 민중세력의 승리 또는 패배라는 길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이 오랫동안 현상유지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우리들 중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내란이 일어날 경우 민중세력이 승리하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군부가 분열되기를 기대했으나, 아옌데에게 충성하는 군인들이 9월 11일 쿠데타 이전에 모두 숙청되었으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내란에서 민중세력이 승리한다면, 우리의 영화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모든 칠레 사람들에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였다. 우리가 내란에서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국가건설의 첫 단계가 시작되면, 지나간 일들을 분석함이 매우 중요해지는 과도기가 올 것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당시 칠레에서 일어났던 일들의 증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만약 쿠데타가 일어난다면-실제로 그렇게 되었는데-우리가 하는 일은 더욱 타당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민주적 민중정부가 들어섰던 몇년 동안 칠레 민중이 이룩해 놓은 것들에 대한 기념물이며 헌정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국제적 연대의 추구가 기본목표인 영화나 역사적 배경에 의존하는 선동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칠레 민중을 도와달라는 감상적 호소도 아니다. 그 대신, 이 영화는 우리 민중세력의 방향설정의 착오와, 우익이 조직한 대규모의 공격과 좌파의 내부분열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상황을 신비화하지 않으며, 어두움을 걷어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낙관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한 민중은 영화에서 배우고, 교훈을 끌어내고, 그리고 계속 투쟁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