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9일 금요일

[Book] Santa Evita, #1-2

[27_MAR_2011] Santa Evita







Latin21 [리뷰]


[제목]: 산타 에비타
[저자]: Tomás Eloy Martínez
[역자]: 권미선
[대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JAN 31 - APR 29, 2011)
[독서]: 제1회독 (FEB 16- MAR 09, 2011)




  1. 아르헨티나의 國母, 에비타 死後, 방부처리된 屍身의 유랑기.






  2. 발췌: 『에바 페론(El caso Eva Perón)』(#1, p.36에서 재인용).


    1. 박제사, 페드로 아라 박사의 死後 비망록




        그날 오후 그녀를 본 그 짧은 몇 초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를 볼 수만 있었더라도
        꽃향기가 전해지는 듯한 그녀의 숨소리를 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십대의 젊고 화사한 기운을 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만 되었더라면 아무런 주저 없이 그녀의 시신을 원래 모습 그대로 돌려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내게로 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많이 상한 후였다.
        이런 경우에는 순전히 내 직감과 그녀의 사진에만 의지해서 작업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피에타빅토리 데 사모트라시아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보다 많이 그녀의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는 그런 바람이 그녀를 더욱 완벽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발췌: 『한겨레신문』, 2011년 5월 9일자, 30면.


    1. [유레카] 에비타와 빈라덴



        (전략)
        '잠들지 못하는 성녀' 에비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가 1952년 33살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시작된다.
        페론에비타의 주검을 미라로 만들어 노동복지부 건물에 안치했다.
        장례에는 몇백만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1955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에비타의 주검을 빼돌려 병영에 숨겼다.
        에비타 숭배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싹을 자르려 한 것이다.
        주검은 그 뒤 16년 동안 다섯 나라를 떠돌며 방랑의 세월을 보낸다.
        1970년 페론 추종자로 구성된 좌파 게릴라단체 몬토네로스
        페드로 아람부루 장군을 납치해 주검을 숨긴 곳을 추궁하고 끝내 그를 살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에비타의 주검은 1974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남편 페론의 관 옆에 놓이게 된다.
        이어 1976년 탈취를 막고자 보안장치를 한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이장된다.
        주검이 옮겨질 때마다 수많은 지지자와 반대자가 몰렸다.
        지도자의 죽음과 장례가 대중을 강력히 결속시킬 수 있음을 실증한 예다.
        (후략)




  4. 발췌:『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pp.265-270.



    1. 에바 페론, 그 사후의 역사


        에바 페론아르헨티나의 명실상부한 '퍼스트' 레이디였다.
        각 나라에 한 명씩은 있게 마련인 대통령의 아내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력을 행사한 권력자였다는 말이다.
        그녀는 후안 페론이 권력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권 후에도 아르헨티나의 사회 보장 분야와 노동 정책을 담당하였다.
        에바 페론은 아직도 페로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그녀의 정치적 업적은 특히 평등주의를 현실화했다는 데서 빛난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 계층이자 남편 후안 페론의 지지 세력인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에바 재단을 세워 모금을 하고 그 기금으로 의료 사업과 장학 사업을 지원했으며,
        하층민들이 전기나 수도 등의 혜택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을 위한 국가 보조금을 삭감하는 데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에바 페론은 하층 국민들의 우상이자 구원의 상징 또는 성녀였던 것이다.

        페미니즘적 성과도 에바의 치적으로 거론된다.
        1949년 페로니즘적 여성 정당을 창설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정치적 지위를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바 페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여러 비난 중 한 가지는 에바를 창녀로 몰아붙이는 것인데,
        영화 「에비타」에서도 묘사되었듯이 그녀가 유럽을 순방할 때
        스페인에서는 4만 명 이상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로마에서는 창녀라고 욕하며 계란 세례를 퍼붓는 군중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바를 천한 여자로 여기는 태도는 아르헨티나의 상류 계층에서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마르티네즈(『산타 에비타』, 자작나무)가 소개하는 예를 보면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암 치료를 위해 에바의 자궁을 들어내던 날 침묵하지는 못할망정 환호하던 무리들이 있었고,
        길거리 담벼락에는 '암, 만세!'와 같이 병마를 응원하는 낙서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교양 있는 상류층의 입장에서는, 에바후안 페론이 펼친 하층 계급 중심의 정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천박한 사생아이며 바람둥이 3류 배우였던 에바를 국모로 모시는 일이 대단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에바가 출산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천박한 씨앗의 잉태를 영원히 막는 것이니 기뻐할 일이었다.
        에바 자신도 과거의 이력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출생 증명서 등 과거 기록을 위조·폐기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엄하게 처벌했다.

        이렇듯 에바의 과거를 문제삼아 비난하거나 저주하는 입장들은 그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은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비판이 있다면 이것은 에바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이 비판은 실제로 후안 페론이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바는 독재 정권의 유지에 기여했던 인물이 되는 셈이다.
        사실 후안 페론은 개발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을 번번이 훼손하였다.

        후안 페론은 모든 독재자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이 언론 탄압에 능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사의 문을 닫는 일은 예사였고 언론사 자산까지 몰수했다.
        그리고 교육 과정에서 페론 부부의 숭배를 중요 커리큘럼으로 설정하여 정치적 이익을 도모한 것도 후안 페론이었다.

        후안 페론은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도 종종 심각한 지경까지 몰고 갔다.
        1949년 헌법 개정을 통해 후안이 대통령 재임을 노리자,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그러자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페론 세력은 국가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는' 자들을 투옥할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많은 정치인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후안 페론이 맞은 두 번째 대통령 선거도 비정상적으로 치러졌다.
        원래의 선거일보다 앞당겨 1951년 12월에 선거를 실시했고,
        이런 정치적 음모의 결과 후안 페론은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재선되었으며,
        그의 정당은 149석 중에서 135석을 차지하는 놀라운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모든 독재 행각이 에바가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기에,
        그녀도 당연히 독재 정치에 한몫 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평가야 어떻든 후안 페론의 집권기간 동안 음으로 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에바
        1952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암세포는 그녀의 몸을 차근차근 잠식하였고 아무도 이를 막지 못했다.
        35킬로그램에 불과한 몸으로 마지막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에바는 곧 사망했으며,
        아르헨티나는 그녀의 죽음에 오열했다.

        에바 사망 3년 후, 즉 1955년 후안 페론은 권좌에서 물러나 파라과이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한다.
        이런 사태의 중요한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이 페론 정부와 카톨릭 사이의 알력이다.
        1954년 겨울, 페론은 한 카톨릭 성직자 단체를 선동 혐의로 기소했고,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과 사생아 그리고 매춘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런 상황이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 간의 격렬한 불화를 초래해 후안 페론의 정치 생명을 단축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페론 정부의 실각은 反민주적인 정치에 의해 민심이 이반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후안 페론의 하야에 즈음하여 발발한 쿠데타와 내전으로 약 4,000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도,
        결국은 후안 페론에바의 정치적 일탈 행위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젊고 아름다운 권력자 에바, 그러나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비극적 운명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그녀의 사후에까지 이어진다.
        아니 어쩌면 더더욱 슬픈 일들이 그녀가 죽은 후에 벌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에비타」의 주제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영화에서 에바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보이지 않고 사라져도 영원히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여러분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 나의 말은 모두 진심이랍니다."


        에바의 유지처럼, 그녀가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지워 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남편 후안 페론도 그 부류에 속한다는 점은 개운치 않다.

        페론 부부에 대단히 적대적인 논조의 책 『에비타』(P. L. 몽고메리 지음, 동천사)는
        에바 사망 후 후안 페론이 노골적인 성적 방탕을 일삼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안 페론이 국립 여자고등학교를 세우는 데 2,000 만 달러를 쏟아부은 것도
        그 학교가 대통령 침소에 들 소녀들의 공급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도
        후안 페론이 또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맨틱한 기대가 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암으로 잃고 두 번째 부인인 에바도 암으로 잃고 난 후 이사벨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녀도 에바처럼 하층 출신으로 과거 무용수였다.
        알려지기로는 그들이 1955년이나 56년에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마드리드로 망명을 떠났을 때 이사벨도 동행하여 1961년에 결혼한다.
        이사벨은 1931년생이니 서른의 나이에 환갑이 훨씬 지난 남자와 커플을 이루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얻기는 했지만,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에바를 떠나 보낸 후안 페론은 고단한 정치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에바가 사망한 지 불과 수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고 또한 20년 가까이 기약없는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973년 후안 페론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다음 해 사망하고 만다.
        당시 부통령이던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 노동 운동 그리고 정치적 쟁투 때문에 이사벨의 집권 기간은 내내 불안정했다.
        결국 이사벨은 1975년 12월 쿠데타로 축출되었으며, 1981년에는 부패혐의가 확정되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에바의 남편도 남편의 새로운 아내도 모두 정치적으로 패배하고 만 것이다.

        마르티네즈에 따르면 에바의 죽음은 그녀의 친족들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에바가 퍼스트 레이디가 된 덕분에
        가족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해 야자수가 늘어선 부촌에 저택을 짓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 도냐 후아나는 장관들과 도박을 하면 무조건 승리하는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도 에바의 권력에 힘입어 꿈에도 소망하지 못했던 행복한 순간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에바의 사망 직후 후안 페론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에바의 가족을 철저히 외면했다.
        어머니 도냐는 충격으로 병을 얻었고, 그들은 도청 장치 때문에 자기들 방에서도 대화를 글로 대신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비극적 가족사의 가장 큰 희생자는 에바의 남동생 후안시토였다.
        그는 애인이 자신의 횡령을 폭로하자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에바 사망 후 몇 개월 만에 그 부유한 가족은 완전히 파멸하고 만 것이다.

        가장 끔찍한 비극은 에바의 시신이 감당해야 했다.
        후안 페론에바가 죽자 150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울 계획도 했으나,
        그보다는 에바의 시신을 영구히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이 에바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에바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그의 결정은 전대미문의 시신쟁탈전을 야기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방부 처리된 에바의 시신은 아르헨티나의 곡절 깊은 현대사 속에서 한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1955년 페론이 쫓겨난 뒤, 정적들은 그녀의 시신을 이탈리아로 옮겨가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그 사이 에바의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1971년 그 유해는 아르헨티나 내의 페로니스트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마드리드후안에게로 옮겨진다.
        후안 페론의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이사벨이 대중적 지지를 노려 대통령궁에 에바를 묻었을 때,
        이제 망자에게 평안이 찾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2년 뒤 反페로니즘 군대 일파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에바의 시신과 이사벨을 몰아 낸다.
        이렇게 에바의 시신은 20년 이상을 떠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인계되었다.




  5. 에비타 살았을 적 이야기 보따리를 기대했는데, 읽고 보니, 죽은 뒤 시체를 둘러싼 숨바꼭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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